수레바퀴 아래서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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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레바퀴 아래서>는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20세기 초에 문학적 성취를 이룬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1881년 14세의 나이로 마울브론 신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하고 일년만에 신학교를 도망쳐 나옵니다. 그후 시계공장과 서점사원을 일하기도 하였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자살을 시도하는 등 그야말로 질풍노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1906년, 헤르만 헤세가 29세 때 사진의 삶을 투영하여 만든 작품입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자수성가하여 돈은 많이 모았지만 수전노인 요제프 기벤라트의 아들 한스 기벤라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독일에서는 일년에 사오십명 정도, 학업성적이 우수한 아이들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신학교로 진학합니다. 그 신학교를 무사히 마치기만 하면 남들이 우러러보는 목사, 교수가 되어 평탄하고 존경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인생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신학교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 집, 그리고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죠. 한스 기벤라트는 시골 동네에서 가장 촉망받는 우등생이었기 때문에 슈투트가르트에 신학교 시험을 보러가게 됩니다. 그리고 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을 하죠. 작중에 나오는 마울브론 수도원은 실제로 헤르만 헤세가 입학하였다가 도망쳐나온 수도원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낸 1년 동안 힌딩어라는 같은 기숙사 학우의 죽음을 경험하고 헤르만 하일러를 사귀게 되며 심각한 내적 갈등을 겪게 됩니다.
주인공인 한스 기벤라트가 이야기를 이끌어나가지만 정작 헤르만 헤세와 비슷한 삶을 지낸 것은 헤르만 하일러입니다. 천재적인 기질을 가지고 신학교에 들어갔지만 그곳의 규율이 자신의 이상과 너무나도 다른 나머지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도망쳐 나옵니다. 한스 역시 하일러의 영향으로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건강이 악화되어 신학교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죠.
신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한스는 고향에서 요양을 하다 아버지의 추천으로 대장간 기계 수습공일을 하게됩니다. 일주일의 고된 노동을 끝낸 첫 주말, 아버지 요제프에게 용돈을 받아 기계공들과 함께 시내로 나간 한스는 술을 잔뜩 먹고 개울에 빠져 죽으면서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헤르만 헤세가 신학교에 들어가던 19세기 말이나 21세기인 지금이나 교육의 현실이 달라진 것은 크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가 통찰력있는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학교 선생님과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모두 짊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공부하던 한스 기벤라트는 결국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고 사라져버립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주변의 기대가 한스에게는 삶을 망가뜨리는 폭력으로 다가온 것이지요. 그렇지만 그 폭력은 한스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기 전까지는 단순히 막연한 부담감으로만 존재하였습니다. 하일러를 만나고, 자신을 알아 갈 수록 한스는 두통에 시달리게 되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쇠약해져 갑니다. 결국, 공부를 1년도 채 채우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버립니다. 지금까지 타인에게서 강요된 삶의 목적이었던 수도원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한스는 삶의 목표와 의지를 잃어버린 것이지요.
움직이지 않는 수레바퀴는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굴러갈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를 발하죠. 수레바퀴 아래 선 자는 끊임 없이 굴러가는 수레바퀴의 속도를 따라 가지 못하면 그 밑에 깔려 죽어버리거나 뒤쳐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 뒤쳐지면 그 간격은 점점 더 벌어지게 되죠.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라는 헤르만 헤세의 작품을 읽어보고 느낀 것은 헤르만 헤세는 굳건한 자아를 확립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라는 점입니다. 작품안과 지금 우리 현실 속 학교의 역할은 모두가 추구하는 이상과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기보다는 의미없는 두뇌 테스트로 수준 가르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동료애를 통한 인격 수양은 사라지고 비도덕적인 경쟁심을 발휘하여 남을 찍어누르고 정상에 서는 것이 우수한 것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을 심어주기도 합니다. 이는 130년 전 독일과 21세기 한국과 달라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에 잘 순응하는 사람에게는 상을 주고 반항하는 천재에게 벌을 주면서 모든 사람을 획일적으로 만든다는 학교에 대한 문제의식이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는 것은 교육 제도를 변화시키기가 그만큼 힘들다는 것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의무와 직무는 어린 소년의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거친 본능과 욕망을 길들임과 동시에 송두리째 뽑아 버리는 것이다. 또한 그 아이에게 국가적으로 공인된 절제된 평화로운 이상을 심어주는 것이다. 현재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시민이나 임우에 충실한 관료라 할지라도 학교에서의 이런 교육이 없었다면 마구 날뛰는 난폭한 개혁가나 쓸데없는 상념에 사로잡힌 몽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예전에 누리던 삶의 행복을 기억해내는데 성공을 하지만 그것을 실현하지는 못합니다. 유년의 행복했던 추억은 기억의 한 구석에 밀어넣고 어른이 되는 과정을 위한 선택과 수련을 해야하는 처지죠.
구둣방 아저씨 플레이크만이 유일하게 한스의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사람입니다. 동네에서는 고지식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는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공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조용하게 일깨워주는 아저씨입니다. 한스가 죽고 난 뒤에 조문을 온 신학교 선생님들을 보고 "저 사람들이 한스의 불행을 거든 셈이지요."라는 뼈있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한스에게 마지막으로 생의 의지를 심어준 사람이 바로 그 플레이크 아저씨의 조카 엠마입니다. 저 멀리 하일브론에서 한스가 살고 있는 슈바르츠발트로 놀러왔던 엠마는 적극적으로 한스를 유혹합니다. 먼저 키스를 하고 한스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얹기도 하고 코르셋 안에 넣기도 하면서 적극적으로 한스의 마음을 흔들지만 그 사랑은 한스의 의지가 개입할 새도 없이 엠마가 다시 하일브론으로 돌아가면서 한스는 시작도 하기 전에 빠른 실연의 아픔을 겪게 됩니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지, 어떤 사랑을 했던 것인지도 깨닫지못하고 심지어는 자기의 죽음 조차도 자기가 반영된 것인지도 모르게 한스는 생을 마감합니다. 누구보다 크게 타오를 수 있었던 젊음이 결정적인 결과는 하나도 남기지 못하고 맥없이 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이 소설을 접한다면 삶에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을 것이라는 아쉬움 석인 생각을 하며 마지막 책장을 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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