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 김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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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은 아마 처음 읽어본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읽어본 소설인데 꽤 흥미로웠습니다. 매번 티비에서만 보던 김영하를 소설로 접하니 또 새로웠습니다. 짧은 메모 같이 진행되는 이야기가 끊어질듯 묘하게 이어지며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래부터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일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주의해주시기 바랍니다.
마치 메멘토와 같은 영화를 보는 기분입니다. 치매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 그러하듯이 잊혀져 가는 기억, 그리고 그 순리를 거역하려고 노력하지만 언제나 패배하고 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치매라는 것이 인간에게는 정말 치명적이고 한없이 절망적인 질병이지만, 작가들에게는 망각에서 오는 두려움과 절망이라는 것이 글감으로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치매는 늙은 연쇄살인범에게 인생이 보내는 짓궂은 농담이다, 아니 몰래카메라다. 깜짝 놀랐지? 미안. 그냥 장난이었어.
살인자의 기억법은 끝까지 읽어도 뒤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마치 같이 치매에 걸린 것처럼 이리저리 헤매가 결국 같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소설입니다. 결말도 시원하지 않고 과정도 명쾌하지 않습니다. 치매로 모든 것을 단정지어 미루어 버리기에는 과정이나 결말이 모두 아리송한 것이 사실입니다. 사실 작가는 이런 부분을 의도하고 써내려 간듯합니다. 정말 간결하고 쉬운 문장으로 읽기 쉽게 썼지만, 막상 쉽게 읽고나면 무엇을 읽은 것인지 도대체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지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스토리가 흥미롭지만 이야기만 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막다른 골목에 부딪히게 됩니다.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걸린 인간은 벽이 좀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결국 없습니다. 그리고 살인자도 없어집니다. 치매가 왔기 때문이죠. 습관처럼 읊조리는 반야심경처럼 결국 무로 돌아갈 존재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지도 않았을지 모르는 딸을 보호하려고 하고 살인을 저지르려고하죠.
그러므로 공空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살인의 순간이 기억에 남아있지 않기에 딸을 실제로 죽인 것인지 아니면 박주태가 죽인 것인지 알수가 없습니다. 다만, 병수(살인자)의 기억이 심해지지 않을 무렵, 은희(병수의 딸)와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때 병수는 무엇인가를 항상 먹습니다. 그리고 그 맛을 느끼지 못하죠. 레몬소스를 뿌린 치킨과 유산슬, 그리고 국수를 먹지만 무슨 맛인지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것을 작가가 설치한 장치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맛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의미죠. 꿈과 현실이 뒤죽박죽이 되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병수가 박주태를 죽이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 바로 치매가 본격적으로 발병하여 실제의 병수를 잃어버리는 포인트가 됩니다.
레몬소스를 뿌린 치킨과 유산슬을 시켰는데 도무지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먹다보니 맛이 이상하다. 뒤늦게 깨닫는다. 간장을 넣지 않았다. 간장이 어디있나 아무리 찾아도 없다.
이런식으로 소설을 이해하게 되면 병수는 그냥 치매 걸린 환자가 되어버리고 소설을 이해하기가 훨씬 쉬워집니다. 하지만, 결론은 어떤식으로든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치매에 걸려 자기 딸을 죽였을 수도 있지만 이정도의 중증 치매환자가 젊은 여성을 손쉽게 죽이고 신체를 훼손시켜 파묻어 버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있죠. 그래서 이 소설은 독자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답답할 수도 있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결말이죠.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말이다.
저는 병수를 오랫동안 잡고 싶어했던 박주태가 은희를 죽였다는 결말에 힘을 실어주고 싶습니다. 소설이 전개되는 순간에도 박주태, 혹은 안형사가 병수를 압박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형사와 박주태는 협박을 하거나 어르고 달래면서 병수가 범인인지를 캐묻고 있습니다. 병수는 자신을 협박하거나 위협하는 이미지는 원래의 모습인 박주태로 기억을 하고, 어르고 달래는 이미지는 안형사로 기억하는 식으로 기억을 합니다. 연쇄살인마가 병수라는 확신을 가지게 된 주태는 지난 연쇄살인사건이 공소시효가 지나버려 기소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그리고 피의자가 치매에 걸려 죄를 면하고 결국 오랜 수사가 아무런 결론 없이 끝날 수 있다는 조급함에서 치밀하게 계획하게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징벌방에 대한 환상도 갖고 있었다. 관을 연상시키는 좁안 방에 갇혀 뒷수갑이 채워진 채로 혀로 식기를 핥아먹는 장면을 거듭떠올리곤 했다. 나는 처절하게 짓밟힌 채 탈진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 흙의 세계를 극도로 갈망하며 발버둥을 치게 될 것이다. 그 상상은 꽤 짜릿한 쾌감으로 나를 인도하였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소설에 등장하는 모두는 누군가의 피해자입니다. 살인 당하는 요양보호사 은희는 말할 것도 없고, 박주태 형사도 가해자인 동시에 오래된 사건이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은 피해자입니다. 병수도 어린 시절 전쟁의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아버지에게 학대를 당한 피해자인 동시에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가해자입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는 늘 악몽을 꿨다. 잠꼬대도 심했다. 죽는 순간에도 아마 나쁜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길을 잃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한번 더 읽게 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소설이었습니다.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저는 책의 말미, 권희철 문학평론가의 해설에 나오는 말로 이 책의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성숙한 남성은 달콤한 결말에 집착하거나 안달하지 않고 쓰디쓴 결말에 좌절하거나 원한을 갖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권태와 무기력에 따지지도 않는다. 어리숙한 남자들만이 혼자서 심각한 체하다가 미끼에 속아서 뭔가를 잔뜩 기대하며 부풀어놓고는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다고 화를 내며 인생을 저주하다가 얼마 안 가 다시 미끼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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