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작 팩스 다섯장에 70조를 태워?, 블랙머니(Black money)
[블랙머니 Black Money]
정지영 감독
조진웅, 이하늬 주연
2019년 11월 개봉
오랜만의 영화후기입니다. 평소에 금융에 관심이 많아서 금융 관련 영화가 나오면 웬만하면 챙겨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창 큰 이슈가 되었던 론스타 게이트, 외환은행 매각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 "블랙머니"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건 꼭 보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었습니다. 개봉한지는 좀 되었지만 이제라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게되어 마음의 짐을 내려놓은 듯 홀가분합니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사건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여부와는 별개로 영화는 정말 재미있게 잘 만들었습니다. 70살이 넘은 노감독이 그동안 쌓은 연륜을 가지고 제작한 상업영화니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지영 감독은 이전에도 실화를 기반으로 한 영화를 만들어왔습니다. 동족상잔의 비극, 그리고 6.25 이후 빨치산의 행적을 그린 <남부군>, 월남전의 트라우마를 다루는 <하얀전쟁>, 고문기술자인 이근안이 고 김근태 의원을 고문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남영동1985>, 판사에게 석궁을 쏘았다는 뉴스로 떠들썩했던 사건을 기반으로 만든 영화 <부러진 화살> 등 주로 실화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 영화를 만들어 왔습니다. 이번에도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그래도 꾸준하기 인기를 얻고 있는 권력형 비리를 극적으로 구성한 작품이기 때문에 흥행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경제관료 출신의 전관예우와 폐쇄적인 친분 관계에서 생겨난 모피아와 법무부 장관 조국 사건에서 보았듯이 건들 수 없는 살아있는 권력이라고 불리우는 검찰이 맞붙는 형국이니 권력형 비리 영화를 즐겨보는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주의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일단 영화에 나오는 조직과 인물은 거의 실존인물에서 따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영화에서 악의 축으로 분류되는 스타펀드는 론스타 펀드에서 '론'자만 뺐고, 국내 굴지의 은행인 대한은행은 바로 외환은행입니다. 대한은행이라는 이름에서도 국책은행의 느낌이 물씬 풍깁니다. 로비스트 집단으로 묘사되는 CK로펌은 실제 론스타의 법률자문이었던 김앤장 로펌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영화에서 실존에 기반을 둔 가상 이름을 만들 때 앞뒤를 바꾸는 것을 좋아합니다. Kim & Chang에 K와 C를 따서 순서를 바꾸어 놓았죠. 그밖에도 연인관계로 극 초반에 나오다 일찍 저세상으로 가는 금감원 직원과 외환은행 직원도 이 사건에 어느정도 연관이 있던 인물 중 유명을 달리한 사람을 소재로 삼은 기분이 듭니다. 실제로 몇분 계시긴 했지만 영화에서 처럼 청부살인이나 의문사가 아닌 병사로 밝혀져있습니다. 극 중 이경영씨가 연기했던 이광주 총리는 모피아의 핵심으로 지목되었던 이헌재 전 부총리에서 따온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 진실일까요? 제가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생각하는 건 바로 이부분인데요. 사실을 소재로 만들었다고는 하지만 정지영 감독은 "이 사건이 론스타 헐값 매각 사건이다!"라고 단정지어 말했던 적은 없습니다. 다만,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만들었는데 사람들이 "이건 론스타 사건이 아니냐?"는 말을 하곤 한다고 말하기는 했죠. 직접적으로 말은 안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은 이 사건이 론스타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서 느끼셨겠지만 실화를 바탕으로 하긴 했지만 허구적 상상력이 많이 들어갔습니다.
무엇보다 스타펀드가 자산규모 70조짜리 대한은행을 1조 7천억 원에 매입했다고 하면서 매각 과정에서 수십배 차익을 남긴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부채를 제외한 순자산 규모만 따졌을 때 외환은행의 가치는 2조원이 조금 넘습니다. 물론 그 금액을 모두 산 것이 아니고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서 51% 수준의 지분을 샀기 때문에 1조 4천억원 정도를 투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추가적으로 콜옵션을 행사하여 수출입은행 등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 약 8천억원을 매입하였습니다. 이를 엄청난 헐값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행을 외자에 매각하기 위해서 자기자본 비율 전망을 부정적으로 표시하여 가치를 훼손하였고, 법률상 부적합한 산업자본이 은행을 인수하는 등 매각과정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불법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영화에서 말하는 것처럼 수십배의 시세차익은 아니지만 론스타가 외환은행 실질적으로 보유하기 위해서 쓴 금액은 약 2조 원 정도이며 2012년 하나은행에 매각한 가격은 4조 4천억 원입니다. 그리고 보유기간동안 배당으로 받은 돈은 1조 7천억 원이며, 2007년 콜옵션으로 인수한 8천억원의 주식을 1조 2천억원에 매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서 론스타는 실제로 2조원 정도를 투입하여 약 5조원에 이르는 차익을 얻었습니다. 엄청난 수익률이긴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은 수치입니다.
그렇다면 론스타에서 외환은행을 매입할 때 검은머리 외국인, 혹은 우리나라 모피아 자금이 들어갔느냐? 이건 모르는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모펀드가 그렇듯이 투자자의 정보는 밝히기 힘듭니다. 특히, 역외 펀드인 론스타 같은 경우는 조세회피 목적으로 복잡한 구조로 조성되기 때문에 더 밝히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취득과정이나 상식을 뛰어넘는 수익률 등을 보았을 때 충분히 심증은 가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다는 것이 정확한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권력이 모든 것을 해결한다
영화에서는 모피아가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나옵니다. 여야를 가리지 않고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영원히 변치않는 기득권인 검찰도 모피아 앞에서는 고개를 숙입니다. 저는 사실 <내부자들> 처럼 홀딱 벗고 충성맹세라도 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그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모피아는 검찰총장도 건드리지 못하는 실세 중 실세이며 차기 검찰총장도 제 멋대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절대 지존과 같은 존재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럴 수 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럴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설득력이 이미 우리가 신문지 상의 사회면과 정치면, 경제면에서 보아왔던 일련의 사건 흐름, 그리고 합리적인 의심에서 기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우리의 합리적인 의심을 확신으로 만들어주는 일종의 방아쇠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내부자들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조승우가 연기했던 검사와 결이 다르지만 정의와 의협심을 가지고 있는 검사가 부정한 세력과 맞붙어 진실을 찾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는 내용은 검사 영웅 일대기 영화의 전형적인 주요 줄거리입니다. 이런 류를 보면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검사라는 무소불위의 권력 조차 부당한 세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배팅을 해야 겨우 진실의 꼬리라도 수면위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사실에 일반 시민으로서 좌절을 느끼곤합니다. 그렇게 힘 쎄보이는 검사도 자기의 모든 걸 걸고 덤벼도 해결 못하는 일을 권력의 곁불도 쬐보지 않는 우리같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일까요? 데모를 하고 단식 후유증으로 죽어나가면서도 세상과 권력 구조를 직접 바꿀 수는 없습니다.
<블랙머니>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에 대한 불신을 다시 확인하게 해준 영화입니다. <내부자들>에서는 부정한 언론이 있었다면 블랙머니에서는 모피아라는 부정한 권력이 존재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들을 조사하는 검찰 조직도 어디서 부터인지 모르게 썩어있기 때문에 세상의 부조리함을 별볼일 없는 개인이 바꾸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시사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감을 가지고 있는 소수의 사람과 세상을 바꾸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태기 위해서라도 항상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정의와 현실
영화의 주연급 인물이 겪는 내적 갈등의 본질은 바로 정의와 현실 중 한가지를 반드시 택해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 입니다. 극 중 의로운 검사로 나오는 양민혁(조진웅)과 세계적인 국제통상 전문 로펌을 만들겠다는 김나리 변호사(이하늬), 기존의 검찰 조직을 상징하는 부장검사는 모두 권력과 재물이라는 실체적 현실과 정의와 진실이라는 무형의 가치 사이에서 갈등을 합니다. 양민혁은 정의와 진실을 선택하고 김나리와 부장검사는 권력과 꿈을 향해 진실을 외면합니다. 이는 시위대를 바라보며 금융위원회로 올라가는 김나리의 모습, 그리고 금융위원회가 끝나고 시위대를 외면하며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으로 대비가 됩니다.
평소에 시간을 정해 약을 먹는 부장검사도 정의와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그려집니다. 모피아에 굴복하는 장면에서는 이전과 달리 알람을 끄는 것도 잊은 채, 물병을 손에 들고 약을 먹고 있습니다. 모피아를 연행하라고 말하는 순간에 이미 모든 계산을 끝냈을 수 있었겠지만, 약을 먹는 자신만의 루틴을 잊을 정도로 고민을 하며 신중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 것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가치를 돈으로 환가할 수도 있겠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만의 소신을 지키는 양검사를 멋있게 보지만 "선배의 구속 면제, 연봉 20억원"이라면 저는 이미 홀랑 넘어가 증거자료를 불태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현실 속에서 자신의 소신을 꿋꿋하게 지키는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 조차 길바닥에서 단식을 하고 있거나 내부 고발을 하며 힘겨운 법정싸움을 앞으로도 홀로 이겨내야 할 것입니다. 다시금 소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꿔간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해준 영화였습니다.
상업적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저는 이부분에서 큰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조진웅과 이하늬 분이 맡은 역할은 극이 너무 부담스럽지 않도록 양념을 잘 뿌려주고 있습니다. 갑자기 둘이 자연산 회에 소주를 먹는 다거나 국제탐사보도협회가 나와서 이름만 치면 주소가 나온다거나 하는 다소 억지스러운 내용이 있지만, 실화로 만든 뼈에 살을 잘 발랐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극이 진행되는 과정이나 결말이 다소 오글 거리기는 하지만 대중의 기대에 반하지 않고 크게 우울하거나 부담스럽지도 않습니다. 한마디로 대중성을 잘 갖춘 상업영화입니다. 단 한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면, 올 겨울 메가 히트작으로 남을 <겨울왕국 2>와 불과 일주일 차이로 개봉하였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이라도 빨리 개봉한 것이 그나마 다행입니다. 저도 겨울왕국의 유혹을 이기고 블랙머니를 선택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극장을 나오면서 후회는 없었습니다. 간만에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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